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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이라 부르리 | 김병수목사 | 2019-03-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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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부터 동영상 설교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이스라엘이라 부르리 창세기 33:24-28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돈을 많이 벌어서 멋진 의상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크고 화려한 집에서 멋지게 살아보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희망입니다.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이러한 삶이 전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땅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뜬구름 잡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의식주의 가치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살아갔던 인물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성공을 위해만 치열하게 싸운 사람입니다. 야곱은 먼저 성공적으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속여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분노한 형을 피하여 멀리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를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그는 벧엘에서 천사가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야비한 사람에게도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만일 거룩한 사람에게만 임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남의 것을 속여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목표를 이루는 야곱, 그 목표를 위해서는 야비한 수단과 방법이라도 서슴지 않았던 야곱 같은 인생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야곱이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이 땅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그는 또 양을 많이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머리싸움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는 결국 아내들과 재산을 다 가지고 도주하게 됩니다. 고향 땅 앞에서 그는 다시 형 에서의 들끓는 복수의 칼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형편을 돌이킬만한 인간적 계산을 다 해 놓았습니다. 이제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든 재산과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얍복강에 혼자 남게 됩니다. 본문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은 이전과 전혀 다른 씨름을 합니다. 전에는 물질, 명예, 권력, 땅의 유익만을 위해 싸웠다면 이제 야곱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것은 의식주의 가치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는 순결한 싸움, 거룩한 영적 다툼에 온 몸을 던졌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변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자신의 행복, 개인의 목표를 위해서만 싸웠지만, 이제 야곱은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싸움’을 합니다. 전에는 자신의 유익만을 염두해 두면서 기도했지만 이제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영적 씨름을 합니다. 야곱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전심으로 구하며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 전에는 내 지략을 믿고 내 힘으로 투쟁하며 싸웠지만 이제는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원합니다. 본문 26절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러한 야곱의 변화된 모습을 보신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바꾸십니다. 본문 28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전에는 ‘발굼치를 잡다’는 야곱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야비하게 사람의 발굼치를 잡고 속이며 살던 야곱이 이제는 하나님과 씨름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영광스런 인물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자기 힘만 믿고 살았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을 찾고 하늘의 능력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현실의 복만을 추구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본능적인 욕심에 이끌려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 이제는 이웃과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당시에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심했습니다. 제가 1988년에 화성에 제암리기념교회에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 만행을 사죄하면서 일본인 성도들이 지어준 기념관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분을 참지 못한 일본이 일본헌병들을 동원해서 만행을 저지릅니다. 제암리교회에 남자 성도 22명을 가두고 대문과 창문에 대못박고 불을 태워죽입니다. 뜨거 열기를 참다못하고 창문을 통해 나오는 어린이를 학살하고, 살려달라는 아내 2명을 참수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일본 사람들이 사죄하는 마음으로 기념관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당시에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천안에 아우내 장터에도 다녀왔는데 기념될 만한 것을 불도저로 다 밀어버렸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당시에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이 얼마나 성숙했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 대표가 16명이나 되었습니다. 지방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한 곳이 대부분이 교회 지도자였습니다. 운동 후에 일제에 잡혀 들어온 사람들 22%가 성도들이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 1600만명, 중에 기독교 인구가 20만명이 1.5%입니다. 그런데 그 소수의 성도들 중에 운동에 참여해서 옥에 갇힌 사람이 22%를 차지 했으니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참여했는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교회가 목숨을 걸고 나를 지키고, 민족의 자주성을 책임감 있게 느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만큼 당시의 교회를 다니던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에 충만하여 불의에 맞설 힘을 가지고 있었고 정의롭고 용감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동일한 상황이라면 그들과 같이 신앙을 지키고 그들처럼 순교를 각오하고 나갈 힘이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잘난 맛에 취해서 살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마음에 이끌리는대로만 살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며 거룩한 씨름을 하기보다는 아직도 남의 뒤꿈치를 잡고 발목을 붙들며 사는 야곱 같은 본능적이고 원색적인 인생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불리는 씨름을 언제 해 보았는가요? 3.1절을 즈음하여 우리는 자신의 순결을 위해, 나라의 국운을 위해서 처절하게 씨름한 분들의 성숙한 모습을 따라가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젊은 나이에 감옥에 갖혀 씨름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가혹한 현실 앞에서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던 순수한 영혼은 우리들과 거리가 먼 것은 아닌지요? 나의 유익을 위해 목숨을 걸수는 있지만 나의 변화를 위한 거룩한 씨름은 끔찍이도 싫어하지는 않는지요? 정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위대한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조들이 위대하다면 전 세계 만민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더 높이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그 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마음에 품고 본받아야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도 바울은 과거에 ‘사울’이었을 때,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바울’이 되어 이런 고백을 합니다. 골로새서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야곱처럼 하늘에 줄을 대면 비굴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기 때문에 현실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편리하고 안락한 삶을 살면서 점점 십자가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 현실에 안주하다가 천국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사도정신’이 사라진지 오랩니다. 이것이 현대교회의 문제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후대에 좋은 땅을 물려주기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고 앞섰던 믿음의 선조들의 충만한 정신이 다 어디에 갔는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것은 이천년 전 사도들이나 하는 고백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십자가 자랑은 하면서 십자가는 지지 않는 모습, 교회는 자랑하면서 교회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 모습, 믿는다 하면서 십자가 능력을 경험해보지 않는 모습을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인간적 야곱이 변하여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경건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도 이겨내는 성도, 이 땅이 어려울 때 기꺼이 십자가 지는 충만한 힘을 갖추기 원하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교회의 짐을 넉넉히 지고 가는 능력을 갖추기 원하십니다. 현실 앞에서 비굴하게 피하고 도망가는 자가 아니라 당당히 맞서 씨름하는 이 시대의 이스라엘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 나아갑시다. 찬송하며 나갑시다. 이 땅을 후손들에게 아름답게 물려주는 선조로 기억됩시다. 우리의 뒷모습이 부끄럽지 않는 아름다운 영광으로 비쳐지도록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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