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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메시아 운영자 201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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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예배 (1216) 주일오전예배

사랑의 메시아

에베소서 3:14-19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 사랑의 예수님을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성탄절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알고 그분이 주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본문 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우리가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 하지 않는 힘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아무리 풍랑이는 세상 이라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평화를 누립니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주의 사랑 안에 있으면 요동하지 않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3:17).

힘든 일이 있으십니까? 인생이 무료하십니까? 허무합니까? 두렵습니까? 괴롭습니까? 이 사랑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이 사랑을 받게 되면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되어 삶의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이 사랑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힘든 일이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견고한 인생, 흔들림없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뿌리내리면 흔들리는 순간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견고한 하나님의 사랑이 일평생 이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의 크기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18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메시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복음의 크기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느냐하면 그 사랑의 이해가 클수록 신앙의 크기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작은 은혜와 감사와 봉사를 하고, 큰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만큼의 헌신을 하게 됩니다(누가복음 7:41-42 41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자신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의 사랑의 크기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그 사랑의 크기를 알아야할 필요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에베소서 3:18-19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도가 알아야할 첫 번째 지식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메시아 사랑의 넓이는 광대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넓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인종, 신분, 지위, 물질, 학식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받아 주는 사랑입니다. 심지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의 보호자가 되시며, 살인한 강도까지도 품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사랑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바다같이 넓은 사랑이 우리를 품어주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은 무한대로 넓습니다. 그 끝을 알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넓은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범위를 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넓은 하나님 사랑과 달리 편협합니다. 사람의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 출발이 남녀간의 에로스 사랑입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조금더 넓은 사람의 사랑은 자기를 넘어선 형제의 사랑, 필레오의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희생을 선택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내 자녀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을 넘어 함께 사는 이웃을사랑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범위를 정하고, 경계를 그리고 그 안에서만 사랑합니다. 내가 정한 경계 밖의 사람들에게는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아가페 사랑까지는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경계가 없습니다. 구별 짓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포악한 민족 니느웨, 타락하고, 죄가 관영한 니느웨 까지도 하나님이 품기를 원하셨습니다. 경계가 없는 사랑입니다. 민족의 구분이 없고, 편견이 없는 사랑을 하십니다. 요나 선지자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요나는 필레오 형제사랑,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범위를 넘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편협하고, 편견이 있어도 하나님은 넓은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품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둘째, 하나님 사랑의 길이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길이를 알라는 것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사랑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은 오랫동안 변함이 없습니다. 이 사랑은 창세전부터 시작된 사랑이며(과거, 17:24, 1:4), 현재에도 동일하여 어떤 위협이 있어도 안전하며(현재, 8:35-39), 미래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사랑입니다(미래, 8:32). 사랑의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며 한결같이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1:8).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시편을 보면 똑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는 후렴구가 있습니다.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감사할 이유, 찬양할 이유, 예배할 이유, 힘을 낼 이유, 실망하지 않을 이유, 포기하지 않을 이유, 살아갈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짓기 전인 창세로부터 변함없고, 어머니의 뱃속에서도, 태어나 지금까지 우리는 변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90평생, 100세가 되도록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감동된 어르신들이 그 산 증인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모릅니다. 조석간에 변하는 사랑입니다. 말한 마디에 변하는 사랑입니다. 늘 사랑하다가도 어려움이 있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 사랑이 오간데 없이 싸늘하게 식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도 막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길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변덕스럽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무엘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셋째, 메시아 사랑의 깊이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깊습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말로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말하고, 사랑의 포장을 얼마나 잘합니까? 그러나 얕은 사랑, 바닥이 보이는 사랑, 겉치레 사랑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다가도 쉽게 바닥이 나고, 변질되고, 실망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깊어서 변질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주님의 사랑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의 사랑의 깊이가 있습니다. 깊이 감추어진 사랑이어서 그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깊이를 아는 자가 없습니다.

시편 139: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의 깊이를 누가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려면 깊은 사랑을 해보아야 합니다. 표면적인 사랑이 아니라 깊은 사랑을 나누면 그 깊이를 체험하게 됩니다. 은혜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은 표면적인 신앙생활에 머뭅니다. 진정한 영적인 깊이가 없이 외적인 형식에 갖힌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넷째, 예수님 사랑의 높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한이 없이 높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높아서 다다를 수 없습니다. 측량이 불가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그 높은 하나님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저 높은 하늘 위에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땅 위에, 낮고 낮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멸시 받는 죄인이 못 박히는 형틀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셔서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를 완성하셨습니다. 지고한 하나님의 사랑, 그 자리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대신 죽으시기 위해 낮은 자리, 섬기는 자리, 죽음의 자리에 내려 오셨습니다.

 

대림절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지고한 사랑을 경험하고 느끼고 체험해야 합니다. 주님의 높으신 사랑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십자가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의 기쁜 시즌에 우리는 왜 십자가 복음을 말해야 합니까?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사랑이 이 십자가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메시아를 말할 때 오직 십자가만을 말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고전2:2).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준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 사랑을 확증하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이 땅에 재현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본문 17). 세상 모든 신은 자신의 죄의 대가로 죽었습니다. 아무리 숭고한 사랑을 보여주었어도 그것은 모두 죄의 형벌에 대응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없는 죄인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죄없이 우리 죄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분이십니다. 가장 높은 사랑은 십자가 자리에서 발견됩니다. 가장 고귀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주님은 가장 큰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사랑의 고귀함을 보여주신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사랑을 알고는 바로 죽을 수가 없어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를 소원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리에서 지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가장 섬기는 자리에서 가장 큰 영광의 주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두주간 우리들의 소중한 물질과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선교사님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랑의 선물을 모았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이 선물을 받으면 아마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 이것이 무슨 떡이냐고 외칠 것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그들은 힘을 얻을 것입니다. 다시 해보자. 우리가 전해준 주님의 사랑에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 모은 것이 차고 넘쳐서 미자립교회까지 나누어주고, 또 한 박스가 남아서 어디에 드릴찌 고민할 정도로 여러분의 사랑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제 예배를 준비하면서 미자립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여러번 받았습니다. ‘친정집에서 시집간 딸에게 이것저것 보내 주신 것을 받은 느낌이다라고 했습니다. 각종 양념들, 다미마, 미역, 고춧가루, 까나리액, 생활용품, 내복, 과자, 라면...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너무 따뜻한 사랑에 감사하다고 꼭 전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강남역에 한참 바쁜 출근 시간에 확성기를 든 70대 아저씨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분은 아무런 표정도 없었으며 녹음을 해 놓은 듯한 음성으로 반복적으로 외칩니다. 그는 지나는 젊은 직장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봐 젊은이들 뭐 그리 바쁘게 사는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나 다녀. 그렇게 다니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나 책임 못져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그렇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 전도인의 옆을 지나면서 죄의식을 느낍니다. 나는 저렇게 용감하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복음을 심각하게 전하는 분의 옆을 지나는 것 자체가 죄송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뭔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게하는데는 도움이 되었을찌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껴서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에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까지가 율법의 역할입니다. 죄를 지적하고 죄를 알게 하는 역할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른 말을 하여도 율법신앙에 머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품지 않고 외치는 수많은 규칙들, 원칙들에 사람들은 숨이 막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율법의 전도사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용납하며 존중하는 기본적인 사랑의 표현을 해야 합니다. 타인의 눈물을 보면 마음이 아파오고, 타인의 기쁜 웃음을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오직 메시아 사랑의 깊이를 알고 체험하고 감격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고 사랑을 보여주어야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를 믿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해야 사랑의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일을 행함으로 주님을 다시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사랑의 주님의 이름을 높이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기로 인하여 성경에서 수 많은 선조들이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4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명성과 지위와 성공을 위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 사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봉사는 항상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와 섬김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언제나 사랑의 동기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드릴 때 예수님은 그 여인이 풍족한 중에 드린 것이 아니라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은 사랑의 동기를 보셨습니다(12:41-44). 또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닦을 때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7:37). 이 역시 사랑의 동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 얼마나 사랑의 동기로 섬기고 세우고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단지 일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는 마음에 묶여서 봉사 했다면 사랑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 사랑의 동기로 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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